고통체의 뿌리와 근원
부모와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되고 전달된 교육과 종교적 교리, 문화적 전통 등은 에고 지배적인 인간에게 피해의식과 죄책감, 죄의식이라는 원죄의 코드를 심어놓았다. 이 원죄 코드는 사람에게 고통의 씨앗 그 자체로 작용해 왔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이러한 생태적, 내재적 최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성인(聖人)들 조차도 자신 안에 내재된 이 왜곡된 악성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이 또한 신의 섭리이자 잘 짜여진 각본임을 깨달아 신성의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환상과 왜곡된 삶의 길을 걸어왔다.
이처럼 고통은 현상적 관점으로 보면 국가와 인종, 개별 인간을 초월해 존재 자체의 당연한 속성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역으로 뒤집어 보면, 고통 또한 신이 설계하고 신으로부터 부여된, 신의 길을 찾기 위해 펼쳐진 자연스런 섭리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신성한 의도를 잊은 채 물질계에 태어난 인간은 마주하는 삶 자체에서 잠재적인 고통의 원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구조와 환경에 갇힌 상태로 욕망과 감정적 속성이 발달한 인간에게는 오욕칠정이라는 에너지장의 왜곡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생소하고 다소 복잡한 인과 관계를 갖는 고통체를 정리하는 측면에서 그림으로 단순화해 살펴보면 그림 고통체의 계층화 구조와 같이 계층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장 중심에는 우리 몸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물리적 고통체가 있다. 이 물질화된 고통체는 습담, 가스, 점액질, 트림 등으로 배출된다.
물리적 고통체를 둘러싸고 있는 2번째 층은 물질화 고통체의 원인자로 잠재적 혹은 가능성의 에너지장이다. 인간이현생은 물론, 윤회 반복을 통해 쌓아온 부정적 감정, 습, 기억, 스트레스 등이 잠재적인 에너지장을 형성하고 있는 계층이다. 이러한 에너지장이 반복 누적되면 물질화로 발현된다.
3번째 층은 잠재적 에너지장을 초래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와 환경이다. 교육, 종교 문화 등은 존재의 인식 구조에 영향을 주며, 그 틀을 벗어나면 죄책감과 피해의식을 통해 고통을 불러온다.
그리고 개인, 가족, 사회, 국가라는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각종 갈등 또한 고통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 제공자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필연과도 같은 고통(체)의 인과 관계와 그 근본 뿌리는 무엇일까?
무슨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인가? 인간을 끊임없이 고통이라는 왜곡의 굴레로 밀어 넣는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본질과 관련된, 즉 신과 우리가 합작한 성스러운 이원성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의 본질은 신성/불성/자성이다. 즉 신이 창조한 개체화된 신(영혼)이다. 신은 우리를 통해 물질 우주를 경험하고자 한다. 신의 절대 영역은 상대성 즉, 이원성이 아닌 전체(일원성)로 이 영역에서는 자신의 완전함과 사랑, 성스러움을 느낄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은 상대 물질 우주를 창조하고 개체화된 신인 인간을 통해 대리 경험과 체험을 합작하고 고안했다.
체험이라는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비교의 대상이 필요했기에 이원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이 창조됐다. 선을 위해서는 상대적 악을, 평화를 알기 위해서는 고통을, 풍족을 위해서는 부족을, 나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너라는 개념이 필요했다. 또, 물질 우주에서 이러한 성스러운 이원성을 무난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처럼 이원성과 망각은 신이 체험과 경험을 위해 마련한 성스러운 도구인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물질 우주의 수레바퀴를 돌며 신의 대리 임무인 체험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무한히 펼쳐지는 경험의 과정에서 신성한 망각 시스템으로 인해 신성이라는 자신의 족보와 뿌리를 잊었기 때문에 여러 왜곡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분리의 환상, 즉 신과의 분리, 나를 제외한 모든 것과의 분리, 또 삶과 죽음이라는 분리 현상을 통해 스스로 고통의 씨앗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신과의 성스러운 약속이라는 망각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신의 대리 여행자 역할을 시작한 인간의 장구한 세월만큼 왜곡된 에너지를 키워왔다. 계층화 구조를 갖는 고통체는 마치 유기체처럼 그 근본 원인자인 무지와 분리의 착각 등으로부터, 또 자신의 바깥층(1, 2차 원인자)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아 끊임없이 자신만의 산물들인 고통의 결정체들을 생산해 온 것이다.
이처럼 고통(체)이라는 것은 일차원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볼 대상이 아니다. 고통은 영혼(신성)을 깨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선택한 영적인 체험의 일종이다. 고통이 없으면 인간은 기쁨을 알 수도, 영적으로 진화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진화의 기회로 통찰하면 하나의 과정으로 보이지만, 단순한 고통으로 인식하게 되면 끝없는 마음의 상처가 재생될 뿐이다. 이것이 우리 인류가 갖는 인식의 오류이자 큰 환상이다.
그러나 영혼의 갈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혼의 갈망은 가슴이 변하고 확장되어야 드러날 수 있고, 가슴의 변화는 고통의 승화와 함께 나타날 수 있다.
또 고통의 승화는 가슴의 수용성이 높아져야 용이해 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닭이 먼저 인가 알이 먼저 인지와 같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고통의 승화와 가슴의 변화는 고통의 최종 결정체인 고통체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원인자인 고통으로 인해 생한 고통체를 제거해야 가슴이 열리고, 또 고통이라는 일차적 뿌리를 들어낼 수 있다. 이어 열린 가슴은 수용성을 더해 고통체의 해체를 가속화하게 되고 최종 원인자의 실체에 더욱 근접하게 해주는 함수 관계를 갖는다.
고통의 산물이 최종적으로 드러난 고통체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학은 수많은 난치병을 수술과 약물, 주사 등에 의존해 치료한다. 의학 기술이 최첨단을 달리며 진보했지만 증상 만을 볼 뿐, 이면의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시야가 열려있지 않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혼은 병을 통해, 수술이라는 과정을 통해 배워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고 패턴과 감정이 내 고통과 아픔을 계속 가중시켜 병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수용함으로써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이끌라는 영혼의 암시가 담겨있다.